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입 밖으로 이 말이 나왔다. 나도 누나도 순간 당황해서 말이 없었다.
“농담이야~ 왜 이렇게 정색을…”
무안했던 내가 먼저 농으로 무마를 해보려고 했지만 누나는 아직 그럴 기분이 아닌지 그저 맥주만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뭘 또 그렇게 예민하게~”
“네가 나 좋아하는 것 아니었어?”
하고 되묻는다. 당황스럽다.
“뭐?... 그냥 뭐…”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다.
“내가 뭐 하자고 하면 다 해주고~ 매일 붙어 다니고~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애들도 니가 나 좋아한다고 그러던데…”
“누가?”
“아니… 애들이…”
티가 났겠지… 그래 그랬을 거다. 맘에 들지 않는 이놈의 대학도 처음에 누나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던가?
“…”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나도 그냥 앉아만 있었다.
“찬이는 니 친구고~ 찬이랑 나랑 만나도 넌 괜찮아? 좋아하는거 아니야?”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시 물어오는 누나에게 나도 모르게 성질을 냈다.
“알면서 뭘 물어봐~”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던 내가 그래서일까? 누나의 큰 눈이 더 커진다.
“그럼 만나지 말아야겠다”
“…”
우리는 그렇게 어색하게 한참이나 그 곳에서 앉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누나는 언제나 나보다는 용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누나는 다시 내게 물어왔다.
“근데 왜 다른 여자들 만나고 나한테는 관심 없는 척 하는 건데?”
그러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왠지 누나랑은 그러면 안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
누나는 답답했는지 자꾸만 같은 질문을 했다.
“아~ 안 만나면 되잖아~”
버럭 성질을 내는 나를 누나는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 나 갈래~”
하고는 박차고 나와서 차를 몰고 그냥 집으로 와 버렸다.
다음날 나는 학교근처 만화가게에서 하루 종일 만화를 보았다. 왠지 학교에 가기가 좀 그랬다. 누나랑 마주치기도 싫지만 보고 싶기도 했다. 온종일 만화가게에서 살다가 나오니 벌써 저녁이다. 다시 집으로 가려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누가 뒤에서 탁하고 친다.
수연이다.
“오빠~ 찬이 오빠는?”
찬이 여자친구다.
“어? 나 오늘 찬이 못봤는데?”
“아~ 그래?”
하더니 곧 얼굴이 어두워진다.
“왜? 무슨 일 있니?”
“아니~ 요사이 몇 일 동안 찬이오빠가 내 삐삐 씹어서~ 그냥 학교에 오면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왔는데 없길래~”
“그래? 사실 나도 오늘 학교 땡땡이 쳐서 모르겠는데~”
“그럼 오빠 내 부탁 하나 들어줘~”
“응? 뭐?”
“나 술 한잔 사줘~ 그리고 찬이 오빠한테 삐삐쳐서 좀 불러내주면 안될까?”
초롱초롱한 눈으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양 나를 보고 있는 그 애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기는 힘들다.
“그래~”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거니와 지영 누나에게 껄떡대는 찬이 놈에게도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해두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 근처 호프집으로 가서 맥주랑 안주를 시켜놓고는 삐삐를 쳤다.
기다리는 동안 수연이는 재잘재잘 잘도 떠든다.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부터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입이 아플 정도로 수다를 떠는 것을 들어주고 있었다. 왠지 그 애가 귀여웠다. 무릎이 조금 덮이는 회색 플레어 스커트에 흰색 티셔츠를 입은 수연이는 조그마한 작은 체형의 아이여서 그랬는지 옷도 그 애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삐삐의 회신은 오지 않았다. 그런대도 수연이는 조잘조잘 대면서 맥주를 꾀나 먹고 있었다.
“야~ 쪼끄만게 맥주를 왜 이렇게 잘마셔?”
“아~ 뭐야~ 노인네처럼~”
하고 핀잔을 주더니 맥주를 추가한다. 벌써 3잔이나 비웠다. 1500cc나 비웠는데도 멀쩡하다. 꾀나 술을 마시고 다닌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찰랑 소리가 나면서 입구에서 손님이 들어온다. 찬이와 지영 누나다. 순간 내가 멈칫했고 그 다음 먼저 들어오던 찬이가 날 보았고 뒤 따르던 지영 누나가 날 보고 놀랐다. 뒤이어 문을 등지고 앉아있던 수연이가 고개를 돌려 모두가 황당해했다.
이렇게 우리는 어색한 4명이 그날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은 그날이 생각난다. 그날 우리가 우연히 이렇게 마주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서 먼저 찬이 놈을 타박했다.
“야 넌 삐삐치면 전화 좀 해라~ 내가 수연이랑 여기서 40분도 넘게 기다렸는데… 수연이가 너 좀 찾으러 여기까지 왔잖아~ 왜 이렇게 연락이 안되냐?”
“아~ 그래?”
하면서 찬이 녀석이 어색해했다. 지영이 누나는 계속해서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찬이가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수연이를 불러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오겠다고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