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못 온다고?"
"어, 미안. 학원에서 갑자기 레벨 테스트 한데…. 나 간당간당하잖아…. 떨어지면 끝이야…. ㅠㅠ"
"그러면 어떡해? 엄마 혼자선 이거 다 못 해…. 지금도 난장판인데…."
"내가 성우한테 호출해 볼게…. 걔가 비주얼은 그래도 정리정돈은 끝내주거든…."
"성우는 테스트 안 해? 같은 학원이잖아?"
"성우는 전국에서 노는 레벨이야…. 테스트가 필요 없지…."
"어이구…. 너도 그러니까 좀 집중력 가지고 공부를 해…. 맨날 산만하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지 말고…."
"여하튼 성우 불러줄게…. 끊는다…."
갑작스럽게 고장 난 보일러 때문에 집안이 난장판이 돼버렸다.
아들 학원 끝나기만 기다렸는데 항상 이런 식이다. 장롱이랑 식탁, 소파 등 무거운 게 많아 혼자 할 엄두가 안 나서 맥이 빠졌는데 싹싹하고, 자상하고, 깔끔한 성우가 온다니 오히려 반가웠다. 그날 둘의 대화를 엿들은 이후 성우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따스함이 더해진 것도 반가움의 이유였다.
말도 안 되지만 성우가 온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 머리도 하나로 질끈 묶고 무늬 없는 티셔츠와 김장할 때나 꺼내입곤 하는 몸빼 바지도 입었다. 준비가 끝난 것 같아 방을 나서려는 순간 벨 소리가 울렸다. 왠지 모르지만, 신이 나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발걸음도 너무 가볍고 상쾌했다.
"벌써 왔어?"
"네…. 달려왔어요…. 숨차요…. 하하…."
"그럴 거까진 없는데 뭐 하러 힘들게 달려와…."
"어머니 혼자 힘드실까 봐서요…. 제가 다 할게요…. 어머니는 일하시지 않아도 돼요…. 감독만 하세요…."
이 아이는 한마디를 해도 참 따뜻하구나.
현관문 앞에서는 햇살이 비치지 않는데도 난 지금 햇살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손목을 잡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얼른 들어오기나 해…. 천천히 할 테니 조금만 도와줘…."
우리는 구역을 나눠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각 밖으로 일을 잘하시는데요…. 그냥 보기엔 어머니 정말 약해 보이시는데, 약간 의외예요…. ㅎㅎ"
"그래? 그럴 거야. 우리 집 체질이 원래 그래. 어렸을 때도 이사하면 우리 엄마가 집을 온통 수리했거든…. 큼직큼직한 건 당연히 인부들이 하지만 그래도 자질구레한 게 많거든…. 그리고 마당에 화초들도 전부 새로 심고 그랬어…."
"정원도요?. 진짜 힘드셨겠다…."
"그때는 그랬지. 그래도 이쁘게 바뀌는 모습 보면 힘든 줄도 몰랐어. 아무튼 우리 엄마는 뭐든지 다 잘했어…. 그러니 나도 웬만큼은 하겠지? 하하하"
내가 더 일부러 더 능숙한 척하며 돌아다니자, 성우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리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순간 잠시 나는 그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일을 계속해 나갔다. 평소엔 다소 어두운 표정인데 어쩌다 이렇게 한번 활짝 웃을 때는 너무나 황홀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잠시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배고프지? 아줌마는 엄청 배고픈데…."
시장기를 느낀 내가 물었다.
"어?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요? 저도 그 말을 들으니까 엄청 배고픈데요…."
"어떡할까? 나가서 먹을까, 아니면 배달시켜?"
"저기…. 제가 오면서 샌드위치랑 카페라테를 좀 사 왔는데…. 같이 먹으려고요…. 아무래도 집에서 해 먹기 곤란할 것 같아서…."
"응? 아니 넌 일하러 오면서 뭘 그렇게까지 했어?"
샌드위치 뭉치가 어느새 싱크대 위에 놓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꽤 고급스러운 가게에서 만든 것이었다.
"일단 먹고 또 하죠. 근데, 우리 정원에 나가서 먹을까요? 이왕이면 근사하게…."
마지막 근사하게 라는 말 한마디가 정말 근사했다. 그리고 근사한 성우의 제안에 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맑고 청명한 날씨…. 솔솔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 그런 것들이 고개를 나도 모르게 끄덕이게 했다.
샌드위치는 진짜 훌륭했다. 아삭아삭한 양상추와 신선한 토마토, 듬뿍 들어간 모차렐라 치즈만으로 이뤄진 샌드위치는 담백하면서도 든든해서 곁들여 가져온 바닐라 라테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역시 감각이 있단 말이지…. 그리곤 근사하게 배려받는 기분에 갑자기 내가 갓 연애 중인 아가씨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정원 한가운데 나무 그늘 밑에 놓인 의자에 앉아 대문 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어요?"
"응…. 진짜 잘 골랐어…. 너무 맛있다…."
우린 다시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냥 이런 휴식 같은 순간이 너무 좋았다. 침묵 속의 다정한 대화랄까. 바람에 잎사귀 비비는 소리를 내는 주변의 나무들을 가끔 둘러보기도 하고 새털같이 가느다란 구름이 높이 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언뜻 둘이 시선이 마주치면 조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앉아 있었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눈을 반쯤 감은 채 하늘을 올려다봤고 그리곤 어느 순간 언제부턴지 성우의 팔 바깥쪽이 나와 닿아 있음을 느꼈다.
내몸에 닿아있는 녀석의 팔은 나이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었다. 매일매일 무척이나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이 그대로 내몸에 전해져왔다. 순간 눈물이 핑 돌고 쓰다듬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자, 좀 쉬었으니 이제 마무리해 볼까?"
"네…. 어서 일해야죠…."
같이 의자에서 일어나던 성우가 불쑥 말을 건넸다.
"근데 어디서 좋은 향기가 나는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어요. 설명하기도 힘든데 엄청 좋은 향기가…. 흠흠…. 뭘까요?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 난 전혀 모르겠는데, 뭐지?"
"그러게요. 아…. 궁금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봐오던 교복이 아닌 약간은 헐렁하면서도 빛바래듯 한 청바지를 입은 뒷모습이 무척이나 남자다워 보였다. 걸음걸이마저 거침없고 시원시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왜 이렇게 내가 이 아이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감정과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시선은 그의 등에 꽂은 채 이런 상념들을 곱씹었다. 그리곤 몇 걸음을 옮겨 현관문 앞에 이르러 문을 열고 신발을 벗으며 들어가려는 순간, 성우의 얼굴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일정한 속도로 출렁이며 다가와 나의 입술에 닿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멈춰 있다가 떨어졌다. 운동화를 채 벗지도 않은 체, 신발장 문은 반쯤 열린 체, 그 좁은 현관 입구에서 성우의 입술을 느꼈다.
처음엔 우연히 고개를 돌리다 부딪혔다고 생각했다. 좁기도 하고 신발을 벗느라 둘 다 움직거렸으니까. 게다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엉뚱했기에 설마 이게 의도한 입맞춤이라고는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아…. 여기서 나는 향기구나…."
잠시 후 내 뒷덜미를 단단히 잡아채는 손길을 느꼈고 이내 좀 전보다 무척이나 촉촉해진 성우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다시금 닿았다. 그 아이의 까칠한 턱과 코가 느껴졌고 내 입술을 덮고 가볍게 빨아들이는 입술의 흡입도 느껴졌다. 분명한 입맞춤이었다.
난 즉시 밀쳐내려 했다. 그러나 내몸은 전혀 작동하질 않았다. 아랫입술을 살며시 빨던 녀석은 윗입술까지 건드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키스의 아련함에 점점 몽롱해지었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이자, 성우도 내 윗입술을 깨물고는 놓지 않았다.
어느새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 좀 전에 같이 마신 바닐라 향이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 훨씬 달콤했다. 그가 어설프지만 나름대로 혀를 얽혀서 돌리자, 내 입속은 더 뜨거워져 갔고, 손은 허리를 감은 체 더 바짝 당겨 깊은 키스를 퍼부었다.
막상 키스가 시작되자 난 양손만 꽉 쥔 체 꼼짝도 못 했다. 두 손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벌서듯 엉거주춤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곤 조심스레 나도 혀끝을 돌려 그의 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잠시 후 내 등을 더듬어 올라가는 손길이 느껴졌고 몸에 맞닿은 탄탄한 성우의 가슴이 흥분을 더 했다. 혀가 점점 길어진 것처럼 목구멍 끝에 닿을 정도로 깊게 키스를 퍼부었고, 브래지어 아래로 불쑥 그의 손이 들어온 그 순간에야 난 정신이 돌아왔다. 체취에 마음이 가 있는 사이 성우의 손이 내 젖가슴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그제야 느낀 것이다.
나는 순간 몸을 비틀며 밀어내려 했지만, 어느새 두 손목이 성우의 손에 의해 뒤로 꼬인 채 잡혀있음을 알았다. 몸부림을 쳤지만, 가슴 위에 올라와 있던 손이 가슴을 움켜잡은 뒤 자신의 혀를 엉켜오자, 나의 몸짓은 순간 멈췄다. 그리고 곧이어 이리저리 움직이며 젖가슴을 주무르자, 나는 입술을 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성우야…. 그만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한마디 내뱉은 후 겨우 어깨를 밀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물러나 주겠지, 생각했지만, 성우는 다시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땀 냄새와는 좀 다른 체취가 느껴졌다. 한순간의 스킨쉽에 성우가 벌써 남자의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반대편 손이 청바지의 뒤쪽으로 들어와 엉덩이를 터질 듯이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래쪽부터 짜릿한 쾌감이 올라왔다.
"오늘은 안돼…. 여기서도 안돼…. 애 아빠가 올지도 몰라…. 지금은 일단 나가줘…. 부탁이야. 제발…."
있는 힘을 쥐어짜서 소리쳤다. 외침이 통했는지 성우는 포옹을 풀었고 그대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내가 먼저 때리듯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래야만 했다.
"어서 가…. 성우야. 이러다 우리 큰일 나…. 어서 나가…. 응? 어서…."
잠시 숨을 헐떡이던 성우는 나의 계속된 재촉에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콰당하는 문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나도 잠금장치를 걸고는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갔다.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뒤도 안 돌아보고 욕실로 들어간 나는 수도꼭지를 최대한 틀어 세수하고, 입안을 헹구고, 거울을 보며 몸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 깜짝 생각이 떠올라 급히 변기에 앉아 바지를 내리고 팬티를 내려보았다. 진한 향기와 함께 온통 축축이 젖어있었다.
얼른 바지를 벗어서 세탁 바구니에 넣곤 정신없이 팬티를 빨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보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주홍 글씨라도 묻은 것처럼 난 온 힘을 다해 팬티를 씻고 또 씻었다.
한참이나 지나서 겨우 말끔해진 팬티를 빨래걸이에 걸어 놓은 후 넋이 나간 듯 욕조 귀퉁이에 널브러져 앉았다. 그리고 가슴이 터질 듯 생각이 났다. 내가 그 아이에게 한 말이….